본문 바로가기
한국사시험준비

한국사시험 준비 <15. 조선의 대외관계와 두 차례의 전쟁>

by 꼬마무지개 2021. 2. 21.
반응형

<15. 조선의 대외관계와 두 차례의 전쟁>

조선시대 - 명나라: 사대관계

              일, 여진: 교린 관계

조선 초기: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준비 명나라와는 갈등관계

태종 때부터: 명과의 사대관계로 들어가면서 실리추구 관계

전쟁사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 명과의 갈등 초래 → 태종 이후사대외교

*사대정책 *사절 교환(매년 정기적, 부정기적 사절 교환)

*문화적, 경제적 교류(선진문화수입) 자주적 실리 외교

여진

*교린 정책

-회유책: 귀순 장려, 관직 부여, 무역 허용-공무역 개념(국경에 무역소 설치)

-강경책: 4(최윤덕)과 6진(김종서)설치,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 확정) -세종 때

-북방 개척: 사민정책(삼남 지방의 주민 이주)

토관제도(민심 수습 목적)실시

일본

*교린 정책

-강경책: 세종 때 이종무의 쓰시마 섬 토벌(태종 이방원과 함께)

-회유책: 3포 개방(부산포, 염포, 제포), 계해약조 체결(1443) -세종

제한된 범위 내의 교육 허용

1.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동남아시아 류큐, 시암, 자와 등과 교류

2. 왜란과 호란의 극복

1) 왜군의 침략

일본: 가마쿠라 막부-몽골, 무로마치 막부-명과 감합 무역,,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일. 대륙침략 준비 (명나라를 정벌하러 갈 계획) 정명가도 → 조선이 거절.

일본과의 관계

*3포 왜란(1510) 임신약조 체결(1412)

*비변사 설치(임시기구) - 임시 국방 회의기구

*을묘왜변(1555) 교류 중단, 비변사의 상설 기구화

조선의 정세

*일본에 사신 파견, 국방력 약화(대립제, 방군수포제),

국론 분열(붕당정치)

임진왜란의 발발

(1592)

*왜군의 침입(20만 대군)

선조의 의주 피난, 명에 원군 요청

 

2) 전란의 극복(수군의 승리)

*이순신의 활약: 남해 재해권 장악, 전라도 곡창 지대 수호, 왜군의 보급로 차단 왜군의 침략 작전 좌절.

                   -옥포 해전(거제도 위쪽): 왜란 첫 승리

                   -사천 해전: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

                   -한산도 대첩(거제도 아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학익진 전법 사용.

                   -명량 해전(전라도): 정유재란 최대의 승리

                   -노량 해전(여수): 왜란의 마지막 전투, 이순신 전사

 

3) 전란의 극복( 의병의 활약)

*농민이 주축, 향토 지리에 알맞은 전술과 전략 구사

 -곽재우(조식의 제자- 실천강조):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

 -휴정(서산대사): 묘향산

 -유정(사명대사): 금강산

 -정문부: 길주, 고경명: 담양, 김천일: 나주,

*-명 연합군의 승리 (유성룡의 평양성 탈환)

   휴전협상 (-일본)

  조선은 전열의 재정비

   -훈련도감 설치(포수, 살수, 사수로 구성된 직업군인)

  -속오법 실시 (양반, 노비 모두 포함되는 지방군 체제 정비)

  -화포 개량 등

→ 휴전회담 결렬

정유재란(1597) 이순신 명량해전

→ 왜군철수→ 이순신 노량해전

<임진왜란 순서>

1592.4.13 부산(동래성전투) → 상주 함락 →충주 함락(신립) →1592.5.2 한성 함락 →1592.6 선조 의주로 피난

→ 일본 북상 → 1592.6.5 평양 함락 →명나라 원군 파병(1차, 2차)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진주대첩: 김시민, 행주대첩: 권율, 한산도대첩: 이순신

4) 전란의 영향(조선)

경제적 피해

경작지 황폐화, 토지 대장과 호적의 손실로 국가 재정 궁핍

신분제 동요

노비 문서 소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상민, 천민 신분상승(공명첩 발급)

문화재 피해

경복궁, 불국사, 사고 등 문화재 소실/ 서적, 도자기, 그림 등 약탈

*이때 공명첩을 발급 양반수가 무지 많아짐.

노비는 납속책으로 양민으로

 

*임진왜란 발발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 광해군은 국내에 남아서 전쟁에 들어감.

이런 것을 분조. (둘로 나누어서 정치 운영)

 

5) 전란의 영향(일본)

-정권교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성립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조선의 여러 문화재 약탈 문화 발전에 이용

이후, 에도막부의 요청으로 통신사 파견( 이후 막부가 바뀔 때마다 파견, 12차례)

6) 전란의 영향(중국)

-명의 국력 약화(만리장성 축조, 몽골 막고-임진왜란 도움)

-여진족의 성장(후금 건국)

3. 임진왜란 이후

1)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인조반정

*배경

여진족의 후금 건국(1616) 후금의 명 공격 명은 조선에 원군 요청

광해군은 원군을 보냄(여진족 통역관 강홍립 지정 - 비밀지령) 북인과 함께 중립외교 표방.

 

2) 광해군의 정책

대내

*농경지 개간 *토지 및 인구 조사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편찬

*국방력 강화 **궁궐 공사를 많이 진행(왕권강화위해)

대외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 추진, 강홍립(상황에 따라 대처 지시)

→조.명 연합군의 패배, 강홍립의 항복

 

3)인조반정(1623)

광해군의 유교 윤리에 어긋난 정치(영창대군 살해, 인목 대비 폐위)와 중립외교에 반발.

서인이 주도로, 남인 참여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

서인 정권 수립, 의리와 명분 강조, 친명배금 정책 추진

 

4) 호란과 북벌 운동

 (1)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 시 반정공신이었던 이괄의 난 진압.

정묘호란 (1627)

병자호란 (1636)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영향)

이괄의 난을 구실로 후금의 침입

(황해도 평산까지 진격)

용골 산성에서 정봉수, 의주에서 이립의 활약, 강홍립의 중재

→화의체결(정묘약조) - 형제관계

*청의 군신 관계 요구

주화파 vs 척화파의 대립.

척화파 우세 청의 침입

임경업(의주 백마산성)의 항전

인조의 남한산성 항전(47일간)

삼전도의 굴욕 군신관계 수락.

 

(2) 북벌 운동 - 소중화사상이 퍼짐(명나라의 뒤를 우리가 잇는다)

(인조때 만들어진 수어청, 어영청, 총융청 으로 효종 북벌 준비)

표면적으로는 사대 관계 실제적으로는 북벌 준비.

*효종: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이 중심, 군대 양성, 성곽 수리 등의 전력 강화 추진

*숙종: 윤휴를 중심으로 준비

북벌은 실천되지 못하고 서인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

 

(3) 나선 정벌

러시아의 남하 청군의 원군 요청 조총부대 출동 러시아군 격퇴

 

(4)청과의 관계

북벌운동 → 북학운동 (북학파-실학파)

북학론 대두

*청의 선진 문물 수용을 통한 국가 사회의 발전 추진

*조선 사신(연행사)의 활동(청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청과의

국경문제

*청의 만주 지역 성역화

*조선 사람의 일부가 두만강 이북 지역에서 활동

궁격 분쟁 발생

백두산정계비

(1712)건립

*조선과 청의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건립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정함

 

 

(5)일본과의 관계

에도막부의

국교 재개 요청

*유정(사명대사)파견, 일본과 강화 및 포로 송환

기유약조 체결

(1609)

*부산포에 왜관 설치, 제한된 무역 허용 (광해군 때)

통신사 파견

*일본은 선진 문물 수용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사절 파견 요청

12회에 걸쳐 사절 파견 외교 사절 및 선진 문화의 일본 전파에 기여

울릉도와 독도

*삼국 시대 이래 우리나라 영토, 숙종 때 안용복이 일본 어민을 축출

(안용복의 독도 단판)

19세기 말 이후 조선 정부도 적극적으로 울릉도 관리

(주민 이주 장려, 군 설치, 관리 파견 통해 독도 관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