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선의 대외관계와 두 차례의 전쟁>
조선시대 - 명나라: 사대관계
일, 여진: 교린 관계
조선 초기: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준비 → 명나라와는 갈등관계
태종 때부터: 명과의 사대관계로 들어가면서 실리추구 관계
전쟁사 →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명 |
*정도전의 요동 정벌 추진 → 명과의 갈등 초래 → 태종 이후사대외교 *사대정책 *사절 교환(매년 정기적, 부정기적 사절 교환) *문화적, 경제적 교류(선진문화수입) → 자주적 실리 외교 |
여진 |
*교린 정책 -회유책: 귀순 장려, 관직 부여, 무역 허용-공무역 개념(국경에 무역소 설치) -강경책: 4군(최윤덕)과 6진(김종서)설치,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 확정) -세종 때 -북방 개척: 사민정책(삼남 지방의 주민 이주) 토관제도(민심 수습 목적)실시 |
일본 |
*교린 정책 -강경책: 세종 때 이종무의 쓰시마 섬 토벌(태종 이방원과 함께) -회유책: 3포 개방(부산포, 염포, 제포), 계해약조 체결(1443) -세종 → 제한된 범위 내의 교육 허용 |
1.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동남아시아 → 류큐, 시암, 자와 등과 교류
2. 왜란과 호란의 극복
1) 왜군의 침략
일본: 가마쿠라 막부-몽골, 무로마치 막부-명과 감합 무역,,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일. → 대륙침략 준비 (명나라를 정벌하러 갈 계획) 정명가도 → 조선이 거절.
일본과의 관계 |
*3포 왜란(1510) → 임신약조 체결(1412) *비변사 설치(임시기구) - 임시 국방 회의기구 *을묘왜변(1555) → 교류 중단, 비변사의 상설 기구화 |
조선의 정세 |
*일본에 사신 파견, 국방력 약화(대립제, 방군수포제), 국론 분열(붕당정치) |
임진왜란의 발발 (1592년) |
*왜군의 침입(20만 대군) → 선조의 의주 피난, 명에 원군 요청 |
2) 전란의 극복(수군의 승리)
*이순신의 활약: 남해 재해권 장악, 전라도 곡창 지대 수호, 왜군의 보급로 차단 → 왜군의 침략 작전 좌절.
-옥포 해전(거제도 위쪽): 왜란 첫 승리
-사천 해전: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
-한산도 대첩(거제도 아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학익진 전법 사용.
-명량 해전(전라도): 정유재란 최대의 승리
-노량 해전(여수): 왜란의 마지막 전투, 이순신 전사
3) 전란의 극복( 의병의 활약)
*농민이 주축, 향토 지리에 알맞은 전술과 전략 구사
-곽재우(조식의 제자- 실천강조):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
-휴정(서산대사): 묘향산
-유정(사명대사): 금강산
-정문부: 길주, 고경명: 담양, 김천일: 나주,
*조-명 연합군의 승리 (유성룡의 평양성 탈환)
휴전협상 (명-일본)
조선은 전열의 재정비
-훈련도감 설치(포수, 살수, 사수로 구성된 직업군인)
-속오법 실시 (양반, 노비 모두 포함되는 지방군 체제 정비)
-화포 개량 등
→ 휴전회담 결렬
→ 정유재란(1597) → 이순신 명량해전
→ 왜군철수→ 이순신 노량해전
<임진왜란 순서>
1592.4.13 부산(동래성전투) → 상주 함락 →충주 함락(신립) →1592.5.2 한성 함락 →1592.6 선조 의주로 피난
→ 일본 북상 → 1592.6.5 평양 함락 →명나라 원군 파병(1차, 2차)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진주대첩: 김시민, 행주대첩: 권율, 한산도대첩: 이순신
4) 전란의 영향(조선)
경제적 피해 |
경작지 황폐화, 토지 대장과 호적의 손실로 국가 재정 궁핍 |
신분제 동요 |
노비 문서 소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상민, 천민 신분상승(공명첩 발급) |
문화재 피해 |
경복궁, 불국사, 사고 등 문화재 소실/ 서적, 도자기, 그림 등 약탈 |
*이때 공명첩을 발급 → 양반수가 무지 많아짐.
노비는 납속책으로 양민으로
*임진왜란 발발하자 → 선조는 의주로 피난. 광해군은 국내에 남아서 전쟁에 들어감.
→ 이런 것을 분조. (둘로 나누어서 정치 운영)
5) 전란의 영향(일본)
-정권교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성립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조선의 여러 문화재 약탈 → 문화 발전에 이용
이후, 에도막부의 요청으로 통신사 파견( 이후 막부가 바뀔 때마다 파견, 12차례)
6) 전란의 영향(중국)
-명의 국력 약화(만리장성 축조, 몽골 막고-임진왜란 도움)
-여진족의 성장(후금 건국)
3. 임진왜란 이후
1)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인조반정
*배경
여진족의 후금 건국(1616) → 후금의 명 공격 → 명은 조선에 원군 요청
→ 광해군은 원군을 보냄(여진족 통역관 강홍립 지정 - 비밀지령) 북인과 함께 중립외교 표방.
2) 광해군의 정책
대내 |
*농경지 개간 *토지 및 인구 조사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편찬 *국방력 강화 **궁궐 공사를 많이 진행(왕권강화위해) |
대외 |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 추진, 강홍립(상황에 따라 대처 지시) →조.명 연합군의 패배, 강홍립의 항복 |
3)인조반정(1623)
광해군의 유교 윤리에 어긋난 정치(영창대군 살해, 인목 대비 폐위)와 중립외교에 반발.
→서인이 주도로, 남인 참여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
→서인 정권 수립, 의리와 명분 강조, 친명배금 정책 추진
4) 호란과 북벌 운동
(1)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 시 반정공신이었던 이괄의 난 → 진압.
정묘호란 (1627) |
병자호란 (1636) |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영향) → 이괄의 난을 구실로 후금의 침입 (황해도 평산까지 진격) →용골 산성에서 정봉수, 의주에서 이립의 활약, 강홍립의 중재 →화의체결(정묘약조) - 형제관계 |
*청의 군신 관계 요구 → 주화파 vs 척화파의 대립. → 척화파 우세 → 청의 침입 → 임경업(의주 백마산성)의 항전 → 인조의 남한산성 항전(47일간) → 삼전도의 굴욕 → 군신관계 수락. |
(2) 북벌 운동 - 소중화사상이 퍼짐(명나라의 뒤를 우리가 잇는다)
(인조때 만들어진 수어청, 어영청, 총융청 으로 효종 북벌 준비)
표면적으로는 사대 관계 → 실제적으로는 북벌 준비.
*효종: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이 중심, 군대 양성, 성곽 수리 등의 전력 강화 추진
*숙종: 윤휴를 중심으로 준비
→ 북벌은 실천되지 못하고 서인의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
(3) 나선 정벌
러시아의 남하 → 청군의 원군 요청 → 조총부대 출동 → 러시아군 격퇴
(4)청과의 관계
북벌운동 → 북학운동 (북학파-실학파)
북학론 대두 |
*청의 선진 문물 수용을 통한 국가 사회의 발전 추진 *조선 사신(연행사)의 활동(청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
청과의 국경문제 |
*청의 만주 지역 성역화 *조선 사람의 일부가 두만강 이북 지역에서 활동 → 궁격 분쟁 발생 |
백두산정계비 (1712)건립 |
*조선과 청의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건립 →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정함 |
(5)일본과의 관계
에도막부의 국교 재개 요청 |
*유정(사명대사)파견, 일본과 강화 및 포로 송환 |
기유약조 체결 (1609) |
*부산포에 왜관 설치, 제한된 무역 허용 (광해군 때) |
통신사 파견 |
*일본은 선진 문물 수용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사절 파견 요청 →12회에 걸쳐 사절 파견 → 외교 사절 및 선진 문화의 일본 전파에 기여 |
울릉도와 독도 |
*삼국 시대 이래 우리나라 영토, 숙종 때 안용복이 일본 어민을 축출 (안용복의 독도 단판) →19세기 말 이후 조선 정부도 적극적으로 울릉도 관리 (주민 이주 장려, 군 설치, 관리 파견 통해 독도 관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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